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너럴 셔먼호 사건 (문단 편집) == 전개 == 19세기는 서구 열강에 의한 아시아의 개항 및 식민지화가 극에 달한 때였다. 당시 유럽과 미국에서는 민, 관을 가리지 않고 눈에 불을 켜고 아시아를 개방시켜 이권을 선점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이 즈음하여 [[아편 전쟁]]과 [[쿠로후네 사건]]으로 중국과 일본도 개항의 길을 선택했다. 민간상선인 제너럴 셔먼호 역시 비슷한 이유로 조선을 개항의 대상으로 선택하였다. 제너럴 셔먼 호의 미국인 선주, 프레스턴은 조선을 미개국으로 착각하고 조선 개항을 선점하여 한몫 잡을 생각에 단독으로 조선에 개항을 강요하려고 했다. 그는 배를 중국 톈진에 기항하였고 영국의 메도스 상사와 용선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렇게 제너럴 셔먼 호는 메도스 상사에 위탁된 채 조선으로 출항했다. 이 배에는 영국 웨일즈 출신 [[개신교]] [[목사]]인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토마스]]가 조선어 통역관으로 승선해 있었다. 그는 1865년 9월에 세관을 사임하고 1차 조선 선교 여행을 하며 성경책을 나누어주며 선교 활동을 했으나, 조선 당국에 적발되어서 추방당했다. 이듬해인 1866년 [[프랑스]]에서는 [[병인박해|프랑스 신부]]들의 학살에 항의차 조선으로 떠나는 [[프랑스 해군]] 원정 함대에 통역관으로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는 때마침 [[베트남]]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상하이]]로 떠났다. 낭패한 토마스는 미국의 상선인 제너럴 셔먼 호에 통역관으로 승선하여 다시 조선으로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부]]에 이르렀고 [[평양부]] 관민들에게 수교를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반발하여 만경대 한사정(閑似亭)까지 거슬러 올라와 약탈을 감행했다. 처음에는 제너럴 셔먼호에 식량이 떨어졌다고 도움을 요청하자 조선 측에서 [[소고기]]와 [[쌀]]과 [[채소]] 등 식량과 배에 필요한 자제를 거저 나눠주기까지 했으나 이들은 장마 비에 불어난 대동강 물을 거슬러 올라 약탈을 감행하였다. 이에 [[조선군]]이 출동하였으나 배에서 가해진 포격에 여러 군졸 및 구경하던 백성들이 죽고 다쳤다. 조선군도 대응 포격을 했지만 포의 사정거리가 짧은 탓에 효과를 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평안감사 박규수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물러가라며 중군 이현익을 보냈으나 되려 그를 잡아가두고 통상을 요구했다. 실록에 따르면 중군이 납치된 것을 본 군졸들과 백성들이 노하여 배를 포위하고 [[활]]과 [[화승총]]을 쏘아대고 돌을 던지자 제너럴 셔먼 호의 선원들은 두려워 했고, 퇴역 장교인 박춘권이 조각배를 타고 접근해오자 중군 이현익과 부하들은 셔먼 호에서 뛰어내렸고, 이현익은 무사히 박춘권의 배에 올라탔으나 부하들은 익사하고 말았다. 분노한 군민들이 몰려오는 것을 본 제너럴 셔먼 호는 도망치려고 했으나, 중군을 억류했다 풀어주는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대동강 수위가 낮아져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평안감사 [[박규수]]는 밤중에 [[화공선|기름을 뿌린 짚을 가득 실은 목선들]]을 가득히 보내서 불을 질렀다. 결국 배는 버티지 못하고 불탔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제너럴 셔먼호 화재.png|width=100%]]}}}|| 토마스 선교사를 비롯하여 배에 타고 있던 [[선장]]과 다른 [[상선사관]] 등 승무원 중 서양인은 5명뿐이었고 나머지 선원 19명은 동양인 중국인과 말레이시아 선원이었는데 몇 명이 가까스로 뭍으로 헤엄쳐 올라왔다. 개화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박규수는 이들을 [[포로|죽이지 않고 잡아서]] 협상에 쓰고자 했으나 백성들이 내놓으라고 하는 분노가 너무 엄청나서 견딜 수 없었다. 결국 통역을 맡았던 토마스를 비롯해 청나라 선원 이팔용, [[말레이시아]] 및 미국인 선원들은 분노한 민중들에 의해 맞아죽는다. 조정에선 5명의 서양인은 그렇다쳐도, 중국인 선원까지 다 죽인 것 때문에 청나라가 문책할까 봐 두려워서 역시 죽이는 건 바라지 않았다. 5년 후 1871년 6월 11일 [[신미양요]]로 [[미합중국 해군]]이 초지진을 점령한 첫날, 조선인 천주교도를 태운 배가 작약도에 머물고 있던 사령관 로저스 제독의 [[기함]] USS [[콜로라도]] 함에 접근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프랑스인]] [[신부(종교)|신부]] 3명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며 혹시나 [[미 해군]] 함선에 승선했을 지 알아보기 위해 왔다고 진술하였다. [[미군]]이 제너럴 셔먼 호의 진상을 묻자 선원들이 조선 측의 정중한 환대와 교역을 약속받고 상륙하였으나 환대를 받고 취해 쓰러진 뒤 살해되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미국 측은 조선 정부의 공식 답변보다 이들의 진술이 신빙성이 있다고 보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